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부미푸트라 정책 (문단 편집) == 역사 == 왜 이 정책이 시작되었는지 알기 위해서는 말레이시아의 역사적 배경을 봐야 알 수 있다. 말레이시아는 말레이계, [[중국계 말레이시아인|중국계]], [[인도계 말레이시아인|인도계]]가 주를 이루는 나라인데, 일단 원주민은 말레이계이며 원래 이들이 인구의 대부분을 차지했다. 이미 과거부터 [[동남아시아]]엔 중국계 상인들이 꽤나 광범위하게 퍼져있었고, 이들 중 일부는 말레이시아에도 정착해 있었다. 게다가 [[19세기]] 후반에서 [[20세기]] 초반 당시 말레이시아를 점하고 있던 [[영국]]은 자신들의 또다른 [[식민지]]였던 [[인도 제국|인도]]와 [[영국령 홍콩|홍콩]]에서 노동자([[쿨리]])들을 같이 대규모로 데리고 오면서, [[말레이시아]]에서 이들의 인구는 급증하게 된다.[* 물론 이것도 사실은 원주민인 [[말레이인]]을 [[노예]]로 부려먹어서 감당하려고 했으나, [[영국]]에서 이미 [[노예제]]가 폐지된 뒤라 차마 그럴 수가 없었다.] 문제는 이 노동자들이 돌아가지 않고 말레이시아에 눌러앉으면서 생겼다. 물론 처음에 이들은 돈이나 벌러온 것이었기 때문에 당연히 본국으로 돌아갈 생각을 했다. 그런데 그 기간 동안 [[인도]]는 [[힌두교]]도와 [[이슬람]]교도간의 갈등으로 [[인도 분단|나라가 두 동강 나고]], [[중국]]은 [[국공내전|좌우대립]]으로 잘못하면 나라가 망하게 생겼다.[* [[일제강점기]]에 [[일본제국]], [[중국]], [[남양군도]] 등으로 끌려간 [[한국인]]들도 [[한국전쟁]]이 발발하여 본국에 돌아가기 보다 현지에 남아 몇세대 동안 산 경우와 같다고 보면 된다.] 결국 어쩔 수 없이 자기들 나라가 좋아질 때까지는 여기서 살자고 했던 것이 오랜 세월 살아오다보니 기반이 [[말레이시아]]에 있고, 말레이시아에서 태어나고 자란 세대들이 주류가 되어 돌아갈 수도 없게 되었다. [[말레이인]]들은 자기들이 오랫동안 터를 잡아왔었고 명실공히 [[다문화주의/반대|이 땅의 자손인데 이방인들이 와서 우리나라를 빼앗는다는 인식]]이 생겨 반발이 일어났고~~거기 중국계와 인도계도 몇 대째 살아왔는데...~~, 결국 이는 최종적으로 [[말라야 연합]]의 해체로 이어졌다. 이런 와중에 [[1948년]] 신설된 [[말라야 연방]]이 부미푸트라 정책과 비스무리한 것을 시행한다. 물론 상술되어있듯 '부미푸트라 정책'이라는 이름이 본격적으로 사용되기 시작한 것은 [[1970년대]]다. 다만 전후적 차이는 전에는 "말레이인을 우대하되 [[외국인]]은 받는다"지만, 후에는 "말레이인을 보호하고자 외국인을 막는다"가 되었다. 여튼 [[1957년]] 말라야 연방은 [[영국]]으로부터 독립하지만, 바로 영역 확장의 필요성을 느끼게 된다. 왜냐하면 말레이인의 비율이 막 과반을 넘기는 수준이었기 때문이었다. 당시에는 말레이인이 50%를 아슬아슬하게 넘기는 수준이라, 말레이인을 우대하는 법을 밀어붙이기가 힘들었다. 그래서 말레이인을 비롯한 원주민의 수를 늘릴 수밖에 없었는데, 막상 그렇다고 [[니콜라에 차우셰스쿠|애를 강제로 낳으라는 뻘짓을 하기도 좀 그랬다]]. 애초에 이 당시에는 종족 가릴 거 없이 자녀를 다섯, 여섯 명 정도는 기본적으로 두던 시절이라서 출산장려정책을 펼 수 있던 상황이 아니었다.[* [[한국]] 역시 [[1980년대]] 이전만 해도 애가 10명인 집이 있을 정도로 출산율이 높았다.] 막상 그렇다고 [[산아제한정책]]을 강압적으로 시행하기에는 말레이시아 면적이 꽤 널널하기도 했다.[* 사실 말레이시아 당국에서도 1960년대에 산아제한 정책을 시작했는데, 당국에서는 이해관계가 복잡하다는 이유로 산아제한 정책에 열의적이지 않았고, 마하타르가 총리직에 재직하던 1980년대에 출산율이 아직 상당한 편이었음에도 인구는 국력이라며 산아제한 정책을 백지화하고, 출산장려정책을 펼쳤다.(당시에는 시대에 뒤떨어졌다고 욕을 먹기도 했지만, 21세기 와서는 선견지명이라는 평이다.) 물론 출산율의 감소세는 멈춘 것이 아니었지만, 인구고령화를 늦추는 데에는 효과적이라서 말레이시아의 출산율은 2010년대 전반기까지는 인구대체수준을 늘 넘었다. 그러나 2010년대 후반부터 출산율이 2명 아래로 떨어지면서 말레이시아도 싱가포르나 한국, 중국, 일본, 대만처럼 고령화되어가는 거 아니냐는 우려가 나오고 있는 중이다.] 그래서 차선책으로 원주민 수를 늘려보고자 한 것이다. [[사바]]와 [[사라왁]], [[브루나이]]에는 [[말레이인]] 민족도 꽤 있고, 말레이계 민족들이 많이 살고 있었기 때문에, 원주민 우대 정책을 내세워 사바, 사라왁의 원주민들[* 민족적 말레이인이 아닌 말레이계통 민족 포함]과 본토의 말레이인에게 동족 의식을 갖게 함으로서 중국계를 억누르고자 한 것이다. 그리하여 [[1963년]] [[말레이시아]]가 신설되었지만, [[싱가포르(주)|싱가포르 주]]가 큰 문제거리가 되었다. 왜냐하면 [[싱가포르]]는 중국계가 압도적 다수인 도시였기 때문. 싱가포르의 총리였던 [[리콴유]]는 "'''[[말레이시아인]]'''의 말레이시아"를 주장하며, 이러한 정책을 비판했다. 하지만 말레이시아 연방정부가 원하는 것은 "'''[[말레이인]]'''의 말레이시아"였다. 결국 대립하다가, 2년 뒤 정부는 [[싱가포르]]를 쫓아내기로 결심했다. 이 때 말레이시아에 거주하는 중국계들이 꽤 많이 싱가포르로 넘어갔기 때문에 말레이시아 정부에서 원하던 대로 되었다. [[1964년]] 예언자 [[무함마드]]의 탄생일 당시 [[이슬람]]을 신봉하는 말레이인과 [[중국인]] 간의 폭동이 있었고, 이것은 말레이시아의 인종문제를 드러내는 계기가 되었다. 정부에서는 "싸우지 말라"고 좀 달래봤지만...결국 [[1969년]] '''[[5.13 사건]]'''[* [[1969년]] [[5월 10일]] 선거에서 이긴 중국계가 말레이시아 수도인 [[쿠알라룸푸르]]로 축하 행진을 하다가 [[5월 13일]] 말레이계 지역인 Kampong Baru를 지나갔고, 거기서 말레이계와 충돌이 일어났다. 혹자에 의하면 한 중국인이 빗자루를 들고 나서 KL에서 말레이계를 쓸어내는 --어그로-- 시늉을 했다는 소리도 있다. 여튼 여기에 빡친 말레이인들이 [[폭동]]을 일으켜서 차와 상점을 불태우고 사망자도 났다. 공식적으론 2백 명, 언론에선 2천 명까지 사망자를 추산하기도 한다. 하지만 폭동은 오로지 [[슬랑오르]] 주에 국한됐고, [[중국인]]이 많이 사는 페낭이나 이포 같은 지역으로까지 번지진 않았다. 해서 시골 같은 지역은 그런 일이 벌어졌는지 알지도 못했다고.]이 발생했고, 그 결과 당시 총리였던 [[툰쿠 압둘 라만]]은 사퇴하고 부총리였던 [[압둘 라작]]이 새 총리가 된다. 그렇게 집권한 압둘 라작 정부는 [[1970년]] 지금의 부미푸트라 정책을 내놓았다. 말레이인들의 지지를 얻은 만큼 말레이계를 중산층으로 끌여올려서 말레이시아 사회를 안정시킴으로써 장기집권을 도모할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물론 화교와 인도계는 부미푸트라 정책을 좋아할 리가 없었지만, 말레이인들의 빈곤을 방치했다가는 1966년 인도네시아 대학살이나 이다 아민 시절의 우간다처럼 화교와 인교들이 추방되거나 학살될까 봐 걱정되었고, 또한 부미푸트라 정책은 국영기업 우선으로 적용했기 때문에 일단 경제적 이권이라도 챙길려면 어쩔 수 없다는 식으로 받아들였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